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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장대 위에서 한걸음 더 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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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장대 위에서 한걸음 더 나가면 (1996년 봄호) 유재주(4단, 소설가, 한얼검도관장)


예전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권위있는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가를 받았다기에 큰 기대를 걸고 영화관을 찾았으나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하품만 해대다 돌아온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제목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따라서 영화를 보고 나면 달마가 왜 동쪽으로 갔는가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졸작 <검>을 쓰기 위해 불교에 관련된 책들을 읽는 동안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말이 영화제목에서 처음 쓰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몰래 얼굴을 붉혔다. 불교 용어에 선(禪)이라는 말이 있다. 선에 대해 얘기할 주제는 안 되고, 또 몇 마디 말로 설명한다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며, 대체적인 뜻은 일반인들도 알고 있을 것이기에 여기서는 그저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겠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의 빛과 그림자이다." 여기서 정법안장이라 함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 그러면 본래면목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 본래면목이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보물이며, 이것을 얻기 위해 많은 수도승들이 고행을 하는 것이다. 나의 수준에서는 그냥 '큰 깨달음'이라고 해야겠다. 선이란 바로 이'본래연목'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행방법이라면 적절할는지. 그런데 불행히도 이 본래연목은 형체도 없고, 맛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더더욱이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다. 글자 그대로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석가모니가 얻은 귀중한 보물은 바로 문자로 어찌 내세울 수 없는 그런 내용이기에 달리 가르칠 방법도, 확인해 볼 방법도 없다. 이리하여 등장한 가르침의 방법이 화두, 즉 공안(公案)이다. 화두의 '두'자에는 별 뜻이 없다. 그냥 말이라는 뜻이며, 공안은 <公府의 案牘>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공부(公府)란 관청을 가리키는 말이며, 안독(案牘)이란 공문서, 또는 판결문 이라는 뜻이다. 관청의 공문서라면 어찌 됐든 절대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권위가 선의 세계로 들어와 공안이라는 용어를 낳았다. 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정법안장을 얻으면 부처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정법안장을 얻을 수 있을까. 역시 답은 간단하다. 옛조상들이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 즉 화두를 깨우치면 정법안장을 얻고 해탈을 한다는 것이다. 그 수수께끼가 무려 1700개나 있다고 하는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말도 바로 그 중 하나인 것을 알고는 다시 한번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고전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형(荊)나라 사람 하나가 활을 잃어버렸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활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잃어버린 활을 찾으려 하지 않는 것이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형나라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형나라 사람이 주운 것인데, 굳이 찾아서 무엇하갰소"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다. "형나라라는 말은 빼는 것이 좋겠소.(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인간이 주울 것 아니겠냐는 뜻)" 그러자 이번에는 노자가 한마디 했다. "사람이라는 말을 빼는 것이 좋겠소.(어디에 있든 이 천지간에 있지 않겠느냐는 뜻)" 조금 보충설명을 하자면, 노니는 세계의 차원이 [개인, 나라, 인간, 우주]이렇게 네 가지 단계로 다르다는 점이다. 검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같이 네 단계 차원의 세계를 대입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성싶다. 위의 네 사람이 열심히 검도를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어떤 사람들이 이들에게, "당신들은 어째서 검도를 하는 것이오?"하고 물었다면 이들의 대답은 어떠할까? 첫번째로, 잃어버린 활을 어째서 찾지 않느냐고 물은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를 지킬 수 있는 체력과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지요. 스트레스 해소에도 만점이구요. 경기에 나가 우승을 하는 것도 목표중의 하나이지요" 이 말을 듣고 활을 잃어버린 형나라 사람은 고개를 흔든다. "검도는 그렇게 작은 것이 아니오.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검도를 수련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에는 공자가 대답한다. "그럴듯한 대답이오. 하지만 당신 말대로 검도는 더 크오.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기보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검도를 하고 있소" 마지막으로 노자가 나서서 대답한다. "인간 세계도 천지간의 우주에 견주면 티끌보다 작소. 나는 칼을 통해 대자연의 진리를 깨달으려 하오" 이 가정에 또 하나의 가정을 더해 보면, 이 자리에 달마도 있었다고 해보자, 달마는 과연 뭐라고 대답했을까. 아마도 내 생각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죽도만 휘둘러댔을 것이다. 검도가 단순히 상대방을 때리는 운동이라고 하면 나로서는 그다지 검도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검도를 단순히 스포츠의 하나로 규정짓는 것에 나는 선뜻 동조할 수 없다. 우리 검도계에 '존심(存心)'과 '잔심(殘心)'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놀라운 점은 존심과 잔심이 다른 뜻인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존심과 잔심은 같은 뜻의 말이다. 다만 우리나라와 일본이 사용하는 문자의 표기 방법에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즉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에서도 '늘 한결같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표현 방법이 존심과 잔심으로 표기될 뿐인 것이다. 두 단어에 차이점을 두는 것은 일본에서 사용하는 한자어를 우리식대로 해석하여 풀이한 어리석음이라고나 할까. 일본인들도 '잔심'이라는 말을 풀이할 때 결코 '남아 있는 마음'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넓은 의미로 존심은 검도에만 있는 용어는 아니다. 다도나 궁도에서도 사용하는 말이며, 선(禪)에서도 자주 쓰이는 말이다. 즉 일종의 화두인데, 이 존심이라는 수수께끼를 깨우치면 우리도 선승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평상심(平常心), 부동심(不動心)이라는 말도 모두 같은 뜻을 담고 있는 불가의 용어이다. 중국에 마조(馬祖)라는 선승이 있었다. 마조는 도(道)를 구하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외쳤다.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마라. 평상심이 곧 도이니, 조작이 없고, 옳고 그림이 없고, 취하고 버림이 없으며, 끊어짐과 이어짐이 없는 마음, 이것이 곧 평상심이다" 평상심이라는 말을 '평상시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자기는 늘 마음이 불안하고 의심스러운데, 그렇다면 그것이 평상심입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평상심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평상심은 마조가 말한 대로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세계를 말함이며, 자연의 진리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평상심은 부처의 부처의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요, 해탈의 경지를 일컫는 자유자재의 마음이다. 부동심의 '심(心)'도 바로 이 자유자재의 마음이요, 존심에서 말하는 마음도 바로 이 평상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검도에서는 이러한 마음을 한시라도 늦추지 말 것이며, 공격이 끝난 후에라도 늘 유지해 보여야 한다고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외형적으로 표출하는 행위를 우리는 '존심', 일본 용어로는 '잔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존심은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엿볼 수 있다. 스승이 제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존심이며, 부모가 곁을 떠난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도 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검도를 가르치는 행위에 있어서는 존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때리고 막고 하는 실제적인 행위만을 중요시할 때 검도는 스스로 검도이기를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마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에 장사(長沙)라는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회(會)라는 스님이 오도(悟道:깨우침)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물었다. "사승 남전 화상을 뵙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회 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장사 스님이 다시 물었다. "뵙고 난 후에는 어떠했는가?" 그러자 회 스님이 대답했다."별거 없더군" 이에 장사 스님이 돌아서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렵게 백척 장대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는 주저앉아 버렸군. 거기에서 한걸음을 내디뎌야 온누리에 내 온몸이 되는 것 이거늘"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나는 검도에서 공격연습을 할 때마다 이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을 떠올린다. 공격연습을 일분쯤하고 나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공격은 커녕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저 죽도를 내던지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한 번 더"하고 말한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데 희망을 갖고 온몸의 기력을 끌어올려 한 번 더 공격한다. 그러나 선생님의 입에서는 또 "한 번 더!"라는 말이 나오고, 역시 나는 또 한 번 기력을 끌어올려 한 번 더 선생님의 머리를 친다. 이러한 행위를 서너 번 반복한 후에야 선생님은 칼을 거둔다. 검도가 선 수행법과 비슷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깨우쳤다고 하는 순간 한걸음 더 나가라고 외치는 선사(禪師)들의 가르침이나, 힘이 다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 번 더'라고 소리침으로써 심신의 능력을 극대화 시켜주는 검도 선생님들의 가르침에는 다른 차이가 없다. 검도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겠으나, 그 중 하나로 나는 '깨우침의 연속'을 꼽겠다. '깨우침'은 '아는'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깨우침은 실천을 수반한다. 아는 것이란 글자 그대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깨우침이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타격을 할 때는 허리로'라는 말이 있다. 허리가 뒷받침되는 타격을 하라는 뜻으로,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허리로 타격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는 것과 깨우친 것과의 차이이다. '몸으로 배우고 마음으로 배워라'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몸으로 배우라는 말은 '백척간두 진일보'의 수행법이요, 공격연습에서의 '한 번 더'이다. 마음으로 배우라는 말은 알(知)려고 하지말고, 깨우치(覺)라는 의미가 아닐런지. 이런 면에서 검도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백척 장대 위에서 한걸음 더!" 깨우침에 도달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가르침이 있을까. 때로 선가(禪家)에서의 가르침 방법 중 절묘한 것이 있다. 한 제자가 스승 백장 선사에게 물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입니까?" 백장이 대답했다. "소를 타고서 소를 찾느냐?" 제자가 다시 물었다. "하오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안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긴? 소를 탔으면 집에 가야지" "집에 가서는 그 소를 어떻게 간직해야 합니까?" 이에 백장이 한심하다는 듯 제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목동이 소를 치는 것도 보지 못했느냐? 지팡이를 들고 섰다가 독풀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질 않더냐?" 모름지기 검도에 있어서의 가르침도 목동이 소를 치는 것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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